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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류 (15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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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류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인조반정의 공신이자 영의정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 김여물이 전사하고 어머니마저 여읜 후, 1596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이 되었으며,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여러 차례 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이괄의 난 직후 반대파 숙청을 주도했으며, 병자호란 시기에는 화의를 주장했다. 말년에는 아들의 죽음과 강빈 사사에 대한 반대로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그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저서로는 《북저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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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류 (1571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김류의 초상화
김류의 초상화
이름김류
한자 이름金瑬
로마자 표기Gim Ryu
이회(以晦)
묵재(默齋)
시호문충(文忠)
출생과 사망
출생1571년
출생지조선
사망1648년 3월 5일
사망지조선 한성부
가족 관계
아버지김우기(金宇器)
어머니증 정부인 파평 윤씨
배우자진주 류씨
자녀3남 2녀
형제자매2남 3녀 중 막내
관력
직책조선의 영의정
임금조선 인조
경력승평부원군
기타 정보
주요 활동인조반정

2. 생애

태종때 좌명공신(佐命功臣)인 김승주의 후손으로, 김승주의 아들 김유온의 6대손이다.[1] 아버지 김여물임진왜란신립의 부관으로 출정했다가 충주 탄금대에서 패전하고 자결하였다. 그는 부친이 임진왜란 때 전사했으므로 순절자의 아들로 음사(蔭仕)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이어 모친까지 사망하면서 22, 23세 때 부친과 모친상을 잇달아 치렀다.[1] 1596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강계 부사 등을 지냈다.[1]

신경진과의 관계가 매우 재미있는데 신경진과는 아버지의 대부터 친분을 쌓아온 사이이다. 신경진의 아버지 신립은 김유의 아버지 김여물을 부장으로 삼아 탄금대 전투에서 동반 전사했으며 인조 반정에서는 그 반대로 김유가 신경진을 휘하에 두고 인조 반정을 일으켰다.

환도 후 영의정이 되고 승평부원군이 되었다. 그는 문장과 필법이 뛰어났으며 저서로 <북저집>이 있다. 문과에 급제할 때부터는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대교, 주서, 봉교 등을 역임하고 형조좌랑, 호조좌랑을 거쳐 충청도도사, 전주판관 등을 많이 역임하였다.

이후 시강원사서, 홍문관부교리를 역임하고 강계부사까지 역임하고 사헌부지평, 사헌부장령을 지냈으나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북인들로부터 모함을 받고 쫓겨난다. 이후 신립 장군의 아들인 신경진과 ‘함께 만 번을 죽더라도 종사를 위해 계책을 도모하자’는 모의를 하게 된다.[1]

1623년 이귀, 이괄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켜 성공, 정사공신으로 책록되었다. 병조참판을 거쳐 벼슬이 대제학에까지 올랐다.

1623년 3월 12일 아들 김경징 및 신경유, 조흡, 이성연 등과 함께 창의문을 통해 대궐로 들어갔다. 반정 이후 모든 수습책과 제반 군무는 그의 손에서 결정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반정 직후 그는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를 맡았다.[1] 반정 후 안정이 필요한 시기에 그는 병조판서 겸 예문관 제학이란 임무를 띠고 수습에 나섰다. 두 직책은 문과 무에 정통해야 수행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는 오직 인재를 발굴하고 붕당을 타파하는 일에 주력했다.[1]

"대신은 체면을 중시해야 한다. 체면이 한번 무너지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혁명 이후에는 논공행상과 사회 질서를 둘러싸고 잡음이 있기 마련이다. 공신들에 의해 주도된 죄인들을 잡아 다루는 일은 자칫 저항과 민란을 부를 수도 있다. 그는 그것을 슬기롭게 헤쳐나갔다. 양관 대제학과 정사공신 1등에 승평부원군으로 봉해진 것도 인조반정이 단행된 그해였다.[1]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예조판서, 병조판서를 겸임하면서 공주로 왕을 호종하기도 했으며 그 공으로 대사헌, 한성부판윤, 도승지, 우찬성을 지냈다.

이괄의 난 직후 인조와 공신들은 도망치기 직전 감옥에 갇혀 있던 반대파들을 처리하려 하였다. 당시 감옥에는 전 영의정 기자헌 등 49명의 정치범들이 갇혀 있었다. 김류는 이들이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고 인조에게 주살할 것을 청했다.[2]

같은 반정 공신이자 서인인 이귀는 이에 반대하였다.

라고 반대하였으나 이는 묵살되었다. 49명의 반대당 인사들은 그의 건의에 따라 하룻밤 사이에 모두 사형당하고 말았다.[2]

1625년, 이조판서,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왕을 호종하고 도체찰사 장만 밑에서 부체찰사로 활약하였으며 예조판서, 좌찬성,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인조는 1634년 3월 김유와 이귀를 불러 주연을 베풀고 술이 절반쯤 되었을 때 세자와 대군을 돌아보고, “너희들은 이 두 사람을 마치 부형처럼 여겨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1]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하루에도 두 번씩 팔도도체찰사 겸 영의정 김류를 불러 자문을 구했다.[1] 위기의 순간마다 발했던 그의 꾀도 창졸간에 당한 청나라 대군과의 전쟁에선 화의론(和議論)이라는 변통책 밖에 뾰족한 수가 없어 인조는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1]

1637년 1월 말 한양으로 환도했으나, 아들 김경징(金慶徵)이 강화도 수비를 실패했다는 이유로 사사당했고 김류 자신도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싸울 때 부총관 직을 맡은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의 상소로 파직과 삭탈관직이 되어 향리로 방축됐다.[1] 그러나 인조는 “이번에 성을 지킨 것은 김 아무개(김류를 지칭)의 힘이었다”고 비호했고, 거듭된 신하들의 주장으로 문외로 송출했다가 이듬해에 특명으로 예전의 직책으로 서용했다.[1]

1644년(인조 22년) 심기원의 역모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함으로써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 해 4월 5일 다시 영의정이 되고,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서훈되었다. 김유는 스무 차례 넘게 사직을 청해 12월 7일 사직하였다가, 이듬해(1645년) 2월 3일부터 1646년 3월 4일까지 다시 영의정을 지냈다.[1]

그러나 강빈 사사에 반대하다 인조의 노여움을 받아 영의정에서 물러난다.

2. 1. 초기 생애

김류는 태종때 좌명공신(佐命功臣)인 김승주의 후손으로, 김승주의 아들 김유온의 6대손이다.[1] 아버지 김여물임진왜란신립의 부관으로 출정했다가 충주 탄금대에서 패전하고 자결하였다. 그는 부친이 임진왜란 때 전사했으므로 순절자의 아들로 음사(蔭仕)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이어 모친까지 사망하면서 22, 23세 때 부친과 모친상을 잇달아 치렀다.[1] 1596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강계 부사 등을 지냈다.[1]

신경진과의 관계가 매우 재미있는데 신경진과는 아버지의 대부터 친분을 쌓아온 사이이다. 신경진의 아버지 신립은 김유의 아버지 김여물을 부장으로 삼아 탄금대 전투에서 동반 전사했으며 인조 반정에서는 그 반대로 김유가 신경진을 휘하에 두고 인조 반정을 일으켰다.

문과에 급제할 때부터는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대교, 주서, 봉교 등을 역임하고 형조좌랑, 호조좌랑을 거쳐 충청도도사, 전주판관 등을 많이 역임하였다. 이후 시강원사서, 홍문관부교리를 역임하고 강계부사까지 역임하고 사헌부지평, 사헌부장령을 지냈으나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북인들로부터 모함을 받고 쫓겨난다. 이후 신립 장군의 아들인 신경진과 ‘함께 만 번을 죽더라도 종사를 위해 계책을 도모하자’는 모의를 하게 된다.[1]

2. 2. 인조반정

김류는 태종 때 좌명공신(佐命功臣)인 김승주의 후손으로, 임진왜란신립의 부관으로 출정했다가 탄금대 전투에서 패전하고 자결한 아버지 김여물과, 뒤이어 사망한 어머니의 상을 잇달아 치렀다.[1] 1596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 대교, 주서, 봉교, 형조좌랑, 호조좌랑, 충청도도사, 전주판관 등을 거쳐 시강원사서, 홍문관부교리, 강계부사, 사헌부지평, 사헌부장령을 역임했다.[1] 그러나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다 북인들로부터 모함을 받고 쫓겨난 뒤, 신립 장군의 아들 신경진과 ‘함께 만 번을 죽더라도 종사를 위해 계책을 도모하자’는 모의를 하였다.[1]

1623년 이귀, 이괄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켜 성공, 정사공신으로 책록되었다.[1] 아들 김경징 및 신경유, 조흡, 이성연 등과 함께 창의문을 통해 대궐로 들어갔으며, 반정 직후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를 맡아 모든 수습책과 제반 군무를 결정했다.[1] 그는 오직 인재를 발굴하고 붕당을 타파하는 일에 주력했으며, 양관 대제학과 정사공신 1등에 승평부원군으로 봉해졌다.[1]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공주로 피란했으며, 이괄의 난 직후 감옥에 갇혀 있던 반대파들을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며 인조에게 주살할 것을 청했다.[2] 같은 반정 공신 이귀는 반대하였으나 묵살되었고, 49명의 반대당 인사들은 그의 건의로 하룻밤 사이에 모두 사형당했다.[2]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로 왕을 모시고 도체찰사 장만 밑에서 부체찰사로 활약했다.[1] 1634년 인조는 김류와 이귀에게 주연을 베풀고 세자와 대군에게 “너희들은 이 두 사람을 마치 부형처럼 여겨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1]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김류에게 자문을 구했으나, 화의론(和議論)이라는 변통책 밖에 뾰족한 수가 없어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1] 1637년 한양으로 환도했으나, 아들 김경징이 강화도 수비를 실패했다는 이유로 사사당했고 김류 자신도 파직과 삭탈관직이 되어 향리로 방축됐다가, 인조의 비호와 신하들의 거듭된 주장으로 이듬해 특명으로 예전의 직책으로 서용되었다.[1]

1644년 심기원의 역모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한 공로로 다시 영의정이 되고,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서훈되었으나, 강빈 사사에 반대하다 인조의 노여움을 사 영의정에서 물러났다.[1]

2. 3. 이괄의 난과 반대파 숙청

태종때 좌명공신(佐命功臣)인 김승주의 후손으로, 김승주의 아들 김유온의 6대손이 된다. 1596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강계 부사 등을 지냈다.[1] 1623년 이귀·이괄 등과 함께 인조반정에 성공하여 정사공신으로 책록되었다.

신경진과의 관계가 매우 재미있는데 신경진과는 아버지의 대부터 친분을 쌓아온 사이이다. 신경진의 아버지 신립은 김유의 아버지 김여물을 부장으로 삼아 탄금대 전투에서 동반 전사했으며 인조 반정에서는 그 반대로 김유가 신경진을 휘하에 두고 인조 반정을 일으켰다.

1623년 3월 12일 아들 김경징 및 신경유, 조흡, 이성연 등과 함께 창의문을 통해 대궐로 들어갔다. 반정 이후 모든 수습책과 제반 군무는 그의 손에서 결정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반정 직후 그는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를 맡았다.[1] 반정 후 안정이 필요한 시기에 그는 병조판서 겸 예문관 제학이란 임무를 띠고 수습에 나섰다. 그는 오직 인재를 발굴하고 붕당을 타파하는 일에 주력했다.[1]

"대신은 체면을 중시해야 한다. 체면이 한번 무너지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혁명 이후에는 논공행상과 사회 질서를 둘러싸고 잡음이 있기 마련이다. 공신들에 의해 주도된 죄인들을 잡아 다루는 일은 자칫 저항과 민란을 부를 수도 있다. 그는 그것을 슬기롭게 헤쳐나갔다. 양관 대제학과 정사공신 1등에 승평부원군으로 봉해진 것도 인조반정이 단행된 그해였다.[1]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공주로 피란했다.[1] 이괄의 난 직후 인조와 공신들은 도망치기 직전 감옥에 갇혀 있던 반대파들을 처리하려 하였다. 당시 감옥에는 전 영의정 기자헌 등 49명의 정치범들이 갇혀 있었다. 김류는 이들이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고 인조에게 주살할 것을 청했다.[2]

같은 반정 공신이자 서인인 이귀는 이에 반대하였다.

라고 반대하였으나 이는 묵살되었다. 49명의 반대당 인사들은 그의 건의에 따라 하룻밤 사이에 모두 사형당하고 말았다.[2]

1625년,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왕을 호종하고 도체찰사 장만 밑에서 부체찰사로 활약하였다.[1]

2. 4.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김류는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하고 도체찰사 장만 밑에서 부체찰사로 활약하였다.[1]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팔도도체찰사 겸 영의정 김류에게 자문을 구했다.[1] 위기의 순간마다 꾀를 내었던 김류였지만, 청나라 대군과의 전쟁에서는 화의론(和議論)이라는 변통책 밖에 뾰족한 수가 없어 인조는 항복하게 되었다.[1]

1637년 1월 말 한양으로 환도했으나, 아들 김경징이 강화도 수비를 실패했다는 이유로 사사당했고, 김류 자신도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싸울 때 부총관 직을 맡은 유백증의 상소로 파직과 삭탈관직이 되어 향리로 방축됐다.[1] 그러나 인조는 김류를 비호했고, 거듭된 신하들의 주장으로 문외로 송출했다가 이듬해에 특명으로 예전의 직책으로 서용했다.[1]

2. 5. 말년

김류는 1637년 1월 말 한양으로 환도했으나, 아들 김경징이 강화도 수비를 실패했다는 이유로 사사당했고, 자신도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싸울 때 부총관 직을 맡은 기평군 유백증의 상소로 파직과 삭탈관직이 되어 향리로 방축됐다.[1] 그러나 인조는 “이번에 성을 지킨 것은 김 아무개(김류를 지칭)의 힘이었다”고 비호했고, 거듭된 신하들의 주장으로 문외로 송출했다가 이듬해에 특명으로 예전의 직책으로 서용했다.[1]

1644년(인조 22년) 심기원의 역모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함으로써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 해 4월 5일 다시 영의정이 되고,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서훈되었다. 김유는 스무 차례 넘게 사직을 청해 12월 7일 사직하였다가, 이듬해(1645년) 2월 3일부터 1646년 3월 4일까지 다시 영의정을 지냈다.[1] 그러나 강빈 사사에 반대하다 인조의 노여움을 받아 영의정에서 물러난다.

3. 정치 활동

3. 1. 붕당 정치 타파 노력

3. 2. 외교 활동

4. 평가

정두경과 백헌 이경석은 김류를 문무겸전(文武兼全)의 대표적 인물이라 평했다. 이 평가는 김류의 문집인 북저집(北渚集)의 서문에 쓰여 있다.[1]

4. 1. 긍정적 평가

문무겸전(文武兼全)의 대표적 인물로, 그의 문집인 북저집(北渚集)의 서문을 쓴 동명 정두경과 백헌 이경석이 내린 객관적 평이다.[1]

4. 2. 부정적 평가

김류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문집인 북저집(北渚集)의 서문을 쓴 정두경과 이경석이 이러한 객관적 평가를 내렸다.[1]

5. 가족 관계

증조부는 김수렴(金粹濂)이다. 조부는 김훈(金壎)이고, 조모는 신천 강씨(信川康氏)로 부사 강의(康顗)의 딸이다. 아버지는 김여물(金汝岉, 1548년1592년)이며, 어머니는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박수강(朴壽岡)의 딸이다.

부인은 진주 류씨(晉州柳氏)로 류근(柳根, 1549년1627년)의 딸이다. 아들은 김경징(金慶徵, 1589년 ~ 1637년)이며, 며느리는 고령 박씨(高靈朴氏)로 박효성(朴孝誠)의 딸이다. 손자는 김진표(金震標)이다.

6. 저서

김류는 《북저집》을 저술하였다.

7. 관련 작품

7. 1. 드라마

참조

[1] 웹사이트 http://weekly.hankoo[...]
[2] 서적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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